戰後政權轉移過渡時期的工運高峰 1945-1950
台灣在1945年8月結束長達50年的日本殖民統治,並由中華民國政府國民黨政權接收後。在日本殖民時期1920年代末曾一度發展達到高峰、卻在1930年初遭日本殖民政府全面壓制的工人運動,短時間內有了很大程度的復甦。日本殖民時期島內協助組織、發展工人運動的兩大系統:主張革命的台灣共產黨人以及相對抱持改良主義的台灣民眾黨,具有組織工人經驗的運動份子們陸續投入到協助台灣工人運動蓬勃發展的行列中。而勞動者無論在集體行動上所展現積極性與戰鬥性,或是對於團結、組織工會的意願,二戰後皆快速恢復。
1947年2月底前,至少有近20件勞工集體行動事件,參與的勞動者包括:學校教師及職員、醫院受僱者、工廠工人、公部門雇員、公車司機等,都曾發動罷工或怠工等集體行動,罷工的訴求不僅僅限於提高薪資等經濟性要求,更包含了要求公平對待與職場民主決策改革等更激進的主張。
然而,國民黨政權接收台灣不到2年時間,就因接收過程中頻傳的貪腐案例,以及對台灣人民的差別待遇,引發台灣人民普遍的不滿,且在1947年爆發了「二二八事件」的嚴重衝突。事件爆發後,國民黨政權立即由中國大陸調派大批軍隊強力血腥鎮壓下,保守估計至少造成一萬名台灣民眾的死亡。但二二八事件並沒有讓台灣的勞工因而停止積極組織與行動,同時,許多台灣的知識份子與工農階級在二二八事件後,快速轉而支持國共內戰中的中國共產黨,並加入中國共產黨在台灣建立的地下黨組織。
전후 정권 교체기 노동운동의 정점, 1945-1950
1945년 8월, 대만이 50년간의 일본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에 수복된 후, 1920년대 후반 절정에 달했다가 1930년대 초 일본 식민 정부에 의해 완전히 탄압받았던 노동운동은 단기간에 상당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노동운동을 조직하고 발전시킨 두 주요 세력, 즉 혁명적 성향의 대만공산당과 개혁 성향의 대만인민당 출신의 노동 조직 경험이 있는 활동가들은 대만 노동운동의 번영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에 대한 열정과 투쟁성, 그리고 단결하고 노조를 조직하려는 의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1947년 2월 말까지 최소 20건의 집단 노동 투쟁이 발생했습니다. 학교 교사와 직원, 병원 직원, 공장 노동자, 공공 부문 직원, 버스 운전기사 등 참여 노동자들은 파업이나 태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파업은 임금 인상과 같은 경제적 요구를 넘어 공정한 처우와 직장 내 민주적 의사 결정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요구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이 대만을 장악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만연한 부패와 대만 시민들에 대한 차별적인 처우는 대만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1947년 2·28 사건으로 알려진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 이후 국민당 정권은 즉시 중국 본토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폭력적이고 유혈 진압을 감행했고, 그 결과 최소 1만 명의 대만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2·28 사건은 대만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조직 활동과 사회 운동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더욱이 많은 대만 지식인, 노동자, 농민들은 중국 국공내전 중에 재빨리 중국 공산당으로 지지를 바꾸었고, 대만에 설립된 중국 공산당 지하 조직에 가입했습니다.